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구치 히데요 (문단 편집) === 낭비벽 === 물론 여기까지는 나름 그래도 공과 실이 있는 학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비판 받는 진짜 이유는, 업적이 의문시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성도 전혀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주색잡기]]로 인한 낭비벽 때문에 평생동안 금전 문제가 깨끗하지 못했다'''. 노구치가 상경할 때 그의 은사는 자신의 월급을 거의 통째로 건네주었고, 그의 후원자였던 지와키 모리노스케는 당시 [[교사]]의 1달 월급인 12엔보다 많은 15엔을 매달 그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노구치는 지와키의 지원금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고 보다 못한 지와키는 그 후로 5엔씩 나누어 지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는 것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그의 월급은 고작 3엔에 불과했다. 이에 부족을 느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방탕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는대로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자신의 직장에서 고가의 전문서적을 대출한 후 팔아치우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 후 [[츠보우치 쇼요]]라는 작가가 쓴 책에, 시골에서 상경하여 도시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노노구치 세이사쿠'라는 이름의 등장인물이 나오자,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 노구치는 이후 이전의 행동을 반성하는 대신 '세이사쿠'였던 '''[[개명|자신의 이름을 '히데요'로 바꿨다]]'''. 그 개명 과정조차도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꾀를 내어, 고향 근처 다른 마을에 살던 '세이사쿠'라는 사람에게 고향의 다른 노구치 가문에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가달라고 부탁해, 억지로 '노구치 세이사쿠'라는 동명이인을 만들어냈다. 그 후 "같은 마을에 노구치 세이사쿠가 2명 있으니 이상하다"는 이유로 다시 개명을 신청하여 합법적으로 개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틀림없이 돈이 오고 갔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페스트]]가 번지자 각국은 인도적인 목적으로 의료반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노구치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이때 후원자인 지와키가 여비로 쓰라고 준 거금 96엔을 사치에 다 탕진해버렸고, 결국 돈이 떨어져서 청나라로 갈 수 없게 되자 지와키에게 울고불고 매달렸다. 결국 지와키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의 옷을 전당포에 맡겨서 생긴 돈 5엔을 노구치에게 줬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노구치는 청나라 및 [[러시아]] 정부에서 지급된 돈 2600엔을 모두 탕진하고 귀국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노구치는 부잣집인 [[사이토]] 가문의 딸과 약혼한 다음 처가에서 미국에 갈 돈으로 300엔을 지원 받았는데, 여기서 친구들을 불러 요정에서 호화판으로 놀다가 결국 수중엔 30엔만 남았다. 이미 그 전에 다른 곳에서 지원금 명목으로 200엔도 받았는데도 말이다. 결국 총 500엔을 미국에 가기도 전에 다 탕진해버린 것. 그래서 노구치는 다시 만만한 지와키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고, 결국 지와키는 이번에는 사채업자에게서 300엔을 빌려서 노구치에게 주었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 결국 약혼녀인 사이토 가문의 딸과는 결혼하지 않고 미국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다. 일종의 혼인빙자 사기를 저지른 것이다. 미국에 건너가서는 조교가 되었지만 월급은 고작 8달러였으므로, 고향에 편지를 보내 또 빚을 지었다. 그 후 승진하여 월급이 50달러까지 늘어났지만, 여전히 낭비벽은 사라지지 않아서 급료를 받은 날에 36달러나 써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노구치의 낭비벽은 당시부터 유명했고,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금새 빚을 지는 버릇은 여전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느 누구도 노구치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록펠러 연구소에 스카웃되어 연봉이 5천 달러까지 상승한다. 당시 일본 환율로 계산하면 노구치의 연봉은 1만 엔이었다. 동시기 [[일본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의 연봉이 1만 2천 엔이었고 [[미국인]]의 평균적인 연수입은 약 700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구치는 이런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도, 일본에 상을 받으러 갈 때는 돈이 없어서 일본에 있는 친구로 훗날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가 되는 [[호시 신이치]]의 아버지로 제약회사를 운영하던 호시 하지메에게 돈을 구걸했다. 일본에 와서 상금 1천 엔으로 그동안의 빚을 갚았는데, 이조차 빌린 액수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노구치의 평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노구치는 그러고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사치를 계속했고, 그 결과 그가 사후에 가족들한테 남긴 재산은 약 1만 3천 달러였다고 한다. 1928년 화폐가치로 1만 3천 달러를 가졌으면 미국이나 일본이나 잘사는 중상류층 수준이었지만, 1914년에 연봉을 5천 달러를 받게 되었고죽은 때는 1928년이니 [[저축]]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현대 한국으로 바꾸어 보면 연봉이 10억인데 사치를 하는데 바빠서 유산으로 30억 원쯤을 남긴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